한국공익신문 한성영 기자 | 이면도로는 지역 공동체의 작은 혈관처럼 존재한다. 이 공간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용하는 공유 자산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일상 풍경에서 타이어와 고깔콘은 그 공간을 침범한 이기심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단순한 불법적치물이 아니라 우리가 ‘공공’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민낯이다.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법적 단속을 강화하는 건 가장 전통적인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을 진심으로 바꾸고 존중의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강제보다 설득이 필요하다. 그 설득의 가장 강력한 도구는 국가 지도자의 언어다. 대통령은 법적 권한을 넘어 ‘기준을 만드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보자. 2025년 대통령의 “라면값이 2천 원이라니 국민들이 놀랍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개인 의견처럼 들렸지만 라면 회사들은 이를 곧바로 정책적 조정 신호로 받아들였다. 몇몇 브랜드는 가격을 동결했고 일부 제품은 인하되었다. 국민은 이 메시지를 ‘대표적 생활 언어의 기준 제시’로 받아들였고 이는 시장에 실질적인 반영을 일으켰다. 채무 관련 발언도 마찬가지다. “7년 이상 갚지 못한 5천만 원 이하 악성 채무는 정리해줘야 한다”는
한국공익신문 한성영 기자 | 경제는 수치의 싸움이지만 국민의 삶은 감각의 싸움이다. 물가가 올랐을 때, 그것이 실제 체감되는 생활 수준과 괴리된다면 불안은 더 커진다. 이러한 불안을 대표자가 언급해 줄 때 국민은 안도한다. 그 대표가 대통령이라면 그 말은 곧 시장의 규율로 작용하기도 한다. 2025년 대통령은 “라면 한 봉지가 2천 원이라니 국민들이 놀랍니다”라고 말했다. 간결한 문장 감정이 담긴 멘트. 이 한 문장이 라면 업계를 뒤흔들었다. 인상 계획을 철회하거나 가격을 동결한 브랜드가 생겼고 국민들은 “정말 리더가 우리를 보고 있구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 발언은 단지 음식 가격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활물가에 대한 국가의 기준’을 제시한 순간이었다. 시장은 공공의 시선 앞에 놓였고, 기업들은 행동을 재조정했다. 이는 과거 어느 시대에도 보기 드문 ‘말의 정책 효과’다. 이런 리더십은 과잉 규제가 아닌 ‘사회적 울림’을 통해 조정의 길을 연다. 대통령의 말은 법보다 먼저 행동을 유도할 수 있고 경제의 방향을 수치가 아닌 감각으로 재조정할 수 있다. 이처럼 리더십은 보이는 결과보다 들리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한국언론미디어그룹 한
한국공익신문 한성영 기자 | 참사는 사회의 약한 고리를 무너뜨리는 순간이다. 그 고리에 국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따라 국민의 신뢰는 극단적으로 요동친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은 중요하다. 구조의 책임을 넘어서 감정의 회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과의 대면에서, 이태원 참사 직후, 오송 참사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민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국가가 없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단순한 사과가 아닌 ‘책임의 언어’였다. 많은 국민은 이 발언을 통해 “국가가 다시 나를 보고 있구나”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목숨을 비용으로 바꾸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은 정책적 안전 기준 강화로 이어졌다. 이는 대통령의 발언이 단지 위로가 아닌 ‘구체적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런 사례들은 말의 진정성이 가진 치유의 힘을 증명한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은 ‘있는 그대로의 책임 인식’이며 그걸 직접 국민에게 전하는 것이 대통령의 리더십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 전체의 감정 구조를 회복시키는 시발점이 된다. <한국언론미디어그룹 한성영 회장>
한국공익신문 한성영 기자 | 이면도로에 놓인 타이어 하나는 단순한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공유공간을 대하는 태도를 압축한 상징이다. “여긴 내 공간이야”라는 마음과 “불편하더라도 함께 써야지”라는 마음 사이의 균형이 바로 시민의식이고 그 균형이 무너질 때 불편은 곧 불신으로 번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은 '말'이다. 강제의 언어가 아닌 존중의 언어. 대통령이 “우리 모두의 집 앞은 모두의 공간입니다. 작은 배려가 시민사회의 품격을 만듭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울림은 전국으로 퍼질 수 있다. 실제로 라면값 언급이 시장을 움직였고 채무에 대한 언급이 제도를 흔들었다면—타이어 하나를 치우게 하는 울림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 말은 불법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유의 미학’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시민은 규율보다 의미에 더 깊게 반응하고 의미는 말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행동한 사람들이 늘어나면 타이어가 사라지고 골목이 환해진다. ‘내 집 앞 타이어’를 치운 그 순간 시민은 ‘공유의 책임자’가 되고 사회는 그들 덕분에 조금 더 품격 있어진다. <한국언론미디어그룹 한성영 회장>
한국공익신문 한성영 기자 | 도심의 길을 따라 나 있는 가로수는 단지 녹지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숨결이며 시민의 정서적 쉼터이다. 무더운 여름날 그늘을 드리우고 미세먼지를 걸러내며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시의 숨통을 틔우는 살아 있는 존재다. 하지만 그 발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침묵의 비극’을 우리는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대다수 도시에서 사용되고 있는 금속 가로수 보호판은 ‘보호’라는 이름 아래 설치된다. 어린 나무가 훼손되지 않도록 외부 충격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는 슬그머니 얼굴을 드러낸다. 보호판이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고 결국에는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잘 들어맞던 금속 틀이 어느 순간부터 나무의 줄기를 죄기 시작한다. 줄기는 자유롭게 굵어질 공간이 없고 뿌리는 밀폐된 흙 안에서 숨도 쉬기 어려워진다. 심각한 경우 금속이 나무의 겉껍질을 찢고 내부를 파고들면서 생명줄을 끊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른바 ‘침묵의 살인자’다. 그뿐만이 아니다. 금속 보호판이 밀려 올라오며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하고 판이 뒤틀리면서 도시 미관까지 망가뜨린다. 시멘트 포장면이 갈라지고 도로가 변형